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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의 누정/ 03] 축동면 쾌재정

'나 여기서 쾌재를 부르네'

  • 입력 2022.08.09 08:51
  • 수정 2022.08.09 13:55
  • 기자명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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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시 축동면 쾌재정(快哉亭) 

축동면 구호마을에는 쾌재정(快哉亭)이 있다. 70년대식 가정주택처럼 보이는 이 건물은 정면에 쾌재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거실에 올라서면 창건자 이순의 공적과 사천출신 거유 구암 이정선생의 칠언율시가 새겨진 편액이 걸려있다. 정자로서의 흔적은 이 세 가지가 전부다. 정자를 한때 다른 용도로 사용했는지 부서진 문짝과 소파가 거실에 널려있다. 깨진 유리가 뒹굴고 장판도 없는 시멘트 바닥 그대로다.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해 사람이 다니기가 힘겹고 고사목을 잘라 마당 한쪽에 쌓아 두고 있었다. 폐가도 이런 폐가가 없을 정도다.

쾌재정 편액. 이완용 기자
쾌재정 편액. 이완용 기자

 

고려 명장 이순, 사천에 유배오다

 여기가 고려시대 때의 충신이자 명장 이순 장군이 세웠다는 쾌재정이다. 태어나고 돌아가신 기록을 알 수 없는 이순 장군은 1359(공민왕 8) 홍건적이 침입하자 대장군으로 출전해 물리쳤다. 1361년에 홍건적 20만 명이 또 침입하자 태주에서 격퇴했는데 그 공적으로 서북면도병마사에 올랐다. 그 뒤 양광도도순문사, 기해격주1등공신, 수복경성1등공신, 도체찰사 등에 제수됐다. 1364년에는 최유가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자, 최영, 이성계, 우제 등과 함께 격파했다. 특히 1366년에는 강화도 교동 인근에까지 왜구가 침입하자 이를 격퇴시켰다. 1367년 신돈에 의하여 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5년만인 1371년 신돈이 처형되자 소환돼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오른 분이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창건자 이순을 소개한 편액. 이완용 기자
창건자 이순을 소개한 편액. 이완용 기자

 

 그가 귀양지 사천에서 지은 쾌재정은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비록 정쟁에 밀려 귀양살이를 하고 있지만 처한 현실을 만족해하며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시끄러운 세상을 피해 내려온 그 자체가 쾌재를 불러도 될 만큼만족스러워서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사천에서 왜구를 물리친 뒤 쾌재를 부르며 지었다는 설도 있으나, 아무리 명장이었지만 귀양을 온 신분으로서 왜구를 격퇴했다고 표현하는 데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쾌재정 전경. 이완용 기자
쾌재정 전경. 이완용 기자

 

쾌재정 아래 모여들었던 뱃머리

 옛날에는 쾌재정이 있는 산 아래까지 바다여서 배가 드나들었다. 고깃배도 있었지만, 경상도 중부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실어 나르는 세미선(稅米船)이 정박한 세미창(稅米倉) 이었다. 교통의 요충지였음이 짐작된다. 지금은 남해안 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정자 터 턱밑으로 자동차가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고 있다. 도로 반대편 바다쪽으로는 두원중공업 건물이 벼랑처럼 버티고 있고 군부대도 자리를 틀고 있지만, 예전에는 주변의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쾌재정 전경. 이완용 기자
쾌재정 전경. 이완용 기자

 

 쾌재정은 곤양 군수를 지낸 관포 어득강이 龍山飛翠渡江來 訪古歸龍洞幾回 會是麗朝豊沛地 千年王氣尙佳哉 (용산의 물총새 강 건너 날아와서, 옛날의 귀룡동을 몇 번이나 찾았드뇨, 일찍이 고려 때 풍패의 땅이었으니, 천년의 왕의 기운 아직도 아름답네)라는 시를 남겼다. 또 남명 조식 선생과 구암 이정 선생 일행이 지리산 등산을 위해 이곳에서 출항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에는 육로가 발달하지 않아 대부분 뱃길이었다. 남명 일행도 섬진강을 따라 하동군 화개장터까지 뱃길을 이용해 지리산을 향했다.

쾌재정 옛 터에서 바라본 사천만쪽. 지금은 남해고속도로가 앞을 가로지르고 멀리는 공장 등이 들어서 바다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완용 기자
쾌재정 옛 터에서 바라본 사천만쪽. 지금은 남해고속도로가 앞을 가로지르고 멀리는 공장 등이 들어서 바다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완용 기자

 

주민과 함께 부활을 꿈꾸다

 쾌재정은 임진란왜 때 전소된다. 묘소와 묘비도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인근 선진리성에 주둔했던 왜군이 그냥 두지 않았겠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전향적인 역사인식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런 쾌재정은 일본 강점기 때인 1938년에 백남재, 김성환, 강한중 씨 등의 유림에 의해 중건됐다. 그다음 해인 1939년에는 구호 간이학교가 세워져 이곳에서 개교행사를 했고 1944년에는 학생 수가 많이 늘어나 구호초등학교로 승격했다. 지역 주민에게는 현대식 교육의 산실까지 했으니 대단한 역할을 한 셈이다.

 쾌재정 아래의 구호마을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시어머니가 정자 터에 있는 수령 500여 년생 고목을 당산나무로 여기고 기도를 올려 아들을 낳았다고 하셨다요즘도 벌초때만 되면 아들들이 당산나무 주변의 풀을 베고 청소를 한다고 했다. 마을 이장도 주민들이 가끔 주변 청소를 하지만 한계가 있다. 정자를 복원해 이순 장군의 명예를 회복하고 체계적인 관리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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