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사천의 누정/ 02] 사천읍 구계서원

조선시대 학자 구암 이정 선생 기려

  • 입력 2022.06.20 00:04
  • 수정 2022.08.09 13:57
  • 기자명 이완용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천읍 구계서원(龜溪書院)

조선시대 학자 구암 이정 선생 덕행 기려

구산사사당 건립 후 서원으로 승격

사천읍 사천공설운동장에서 진주시 금곡면 방향으로 10여 분을 달리면 구암마을을 지나 만죽산을 넘는 말미고개가 나오는데 이 고개 중턱 왼쪽에 구계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구계서원 현판. 이완용 기자
구계서원 현판. 이완용 기자

 

광해군 3(1611) 지방 유림들은 문신이자 학자인 구암(龜巖) 이정(李楨:15121571)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구산사(龜山祠)라는 이름의 사당을 건립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40년만이었다. 그 뒤 숙종 2(1676)에는 임금이 구계(龜溪)라는 사액을 내려 사액서원으로 승격됐다. 퇴계 이황 선생이나 성옹 김덕함 선생도 배향돼 있다. 또 최근에는 최관(崔瓘) 선생을 추가로 배향했다.

선생의 위패가 봉안된 구산사 전경. 이완용 기자
선생의 위패가 봉안된 구산사 전경. 이완용 기자

 

 주차장에서 서원을 바라보면 입구인 풍영루까지 50여 칸의 좁은 돌계단이 나온다. 몸가짐을 살피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출입하라며 좁게 만들었단다. 또 돌계단 좌우에는 수 십년생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강학을 하기도 했는데, 그 뒤 은행나무 아래에서 함께 공부했던 벗을 행단지우(杏壇之友)라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의 서원이나 정자에는 은행나무를 많이 심어 유생을 반긴다.

 풍영루를 지나면 왼쪽으로 강당인 구계서원이 있고 맞은편에는 선비들이 기거했던 거경재와 명의재가 있다. 사당인 구산사는 맨 윗쪽에 있다. 구산사 정면 중앙에 구암 과 퇴계 ,성옹, 최관 선생이 나란히 배향돼 있는데 해마다 3월과 9월 중정(中丁)일에 향사하고 있다. 구산사 건물 앞에는 미수 허목 선생이 찬서한 구산사비(龜山祠碑)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김덕함과 최관 선생의 기적비가 있다.

 

17살 때 성균관 들어가 전국 유생들과 학문 닦아

 구계서원에 향사된 구암 선생은 조선 명종 때의 학자로 지금의 사천읍 구암마을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더니 12살 때는 경상도 지역에서 실시한 하과(夏課)에서 장원급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선생은 17살 때는 성균관에 들어가 전국에서 뽑혀온 유생들과 학문을 함께했고, 나중에는 규암 송인수 선생과 관포 어득강 선생을 사사한 뒤 25세 때인 1536년 문과 별시에서 장원급제했다.

구계서원 전경. 이완용 기자
구계서원 전경. 이완용 기자

 

 구암은 다음 해 4월 종 6품의 선교랑으로 벼슬을 시작해 사신으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나중에 형조좌랑, 한성부 판관, 예조정랑 등의 내직을 거쳤다. 30세에는 영천군수를 지냈고 42세 때는 청주목사, 형조참의, 병조참의, 대사간, 예조참의 등도 지냈다. 벼슬에서 잠시 물러나 있을때인 1558(47) 4월에는 스승같이 섬기고 벗과 같이 지내던남명과 지리산을 찾기도 했다. 이 유람에는 황강 이희안과 인숙 이공량, 진주목사 김홍 등이 동행했는데 남명은 전날 이공량과 함께 구암의 집에서 묵고 다음날 지리산으로 향했다. 남명과 구암은 각별했다.

 

임금에게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은 정신 계승

 구암은 경주부윤을 지내면서 왕릉을 보수하고 무열왕릉과 김유신 장군묘에 제사를 지내는 등 사적지 재건에 힘썼다. 서악서원을 창건해 설총과 김유신, 최치원 선생을 향사해 풍속을 교화하기도 했다. 순천부사로 있을때 성리유편(性理遺編)이란 책을 편찬했고, 사화에 연루돼 순천으로 귀향 온 선비들의 명예를 되찾는 데 노력했으며, 옥천정사를 지어 성현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데도 노력했다. 옥천정사는 임금의 사액을 받으면서 옥천서원으로 바꿨는데 경주의 서악서원과 사천의 구계서원이 사액을 받으면서 우리 역사상 세 곳의 사액서원을 건립한 사람은 구암 선생이 유일하다.

 구계서원장 이은식 박사는 구암 선생은 학문을 좋아하고 성현을 현창하는 사업을 누구보다도 많이 하신 분이지만, 오랫동안 벼슬을 하셨고 퇴직 후에는 일찍 돌아가셔서 후학을 양성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학문을 사랑하고 청렴하면서도 임금에게는 추상같은 쓴소리도 주저하지 않은 구암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